나는 낡고 오래 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니 살고 있었다. 그곳은 이모가 우리 식구를 위해 잠시 내어주었던 것인데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과 그에 관련해 이모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 그 정도는 어린 나라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모는 늘 그렇듯이 우리에게 호의를 적선해왔다. ‘베풀었다’가 아닌 ‘적선했다’가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모의 호의는 완전한 것이 아니어서 나와 언니는 그녀에게서 분명한 은혜를 받아왔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는 못했다.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 일방적인 호의 덕분에 나는 지금 계단에 앉아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내가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언니는 바삐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지금 집을 보러 온대!”라고 급히 말했는데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이모가 집을 내놓았고 우리는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다는 걸, 이모의 호의는 딱 이정도 인 것이다. 덕분에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나가야 할 때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집을 비워줘야하는 그 정도의 적선. 나는 지금 그런 입장인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방으로 모아놓고 말했다. “영희도 졸업했고 영순이도 올해 졸업하지? 이모가 너희 졸업 때문에 많이 봐준 건데, 우린 여기까지야.”
나는 물었다. “우린 어디로 가죠?” 아버지가 대답하길 “그건 엄마가 알아서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도 급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청소를 하는 중에도 같은 방에 있는 내게 반복적으로 말했다 “집보러오는 사람이랑, 이모도 함께 올 거야, 망신당하기 싫으면 깨끗하게 청소를 해. 집을 깨끗하게 사용했다는 것을 알려줘야지.”
나는 허겁지겁 청소를 마치고 다른 방에 있던 언니에게도 이모가 온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우리 나갈까?” 나는 언니와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을 재촉해 대충 가방을 챙겨 집을 나왔지만 천원도 없는 애새끼 둘이서 머물 수 있는 곳이 아파트 계단 말고 어디가 있으랴.
우리는 나름 숨는답시고 두 층계를 더 올라가서야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언제 이모가 올지 모르니 나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파트의 머리 긴 나무들이 보인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나를 보고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같다. 가을 오후의 노란 햇빛에 비친 흙과 풀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예쁘다. 너무 예뻐서 서글프다. 계속 우리 집 앞에 있어줘. 가지마. 떠나는 건 나면서도 이 풍경이 나를 버리는 것만 같아 또 서글프다.
나는 잊고 지냈던 것이다. 이곳은 우리가 언제나 머물 쉼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동안 우리 집. 아니 우리가 머물던 공간에 압류딱지가 가구마다 붙어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나는 어떤 위기감이라던 지를 느끼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 해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야 지겹도록 어리석고 나약한 내 모습을 마주했다. 우습기가 짝이 없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운이 좋으면 반지하 단칸방이거나 서울역 근처 다리 밑일거라고. 내 주제에 맞는 상황을 기어코 눈앞에 두고서야만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어떤 움직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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